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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힌두교의 의의
입력: 2017.10.30 00:00
종교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높은 브라만과 낮은 브라만을 얘기한다. 즉 두 진리설인 이제설(二諦說)이다. 마치 파르마니데스의 진리의 길과 허위의 두 길이 있는 것과 같다.
라마누자는 그 간격을 메워버림으로써 현실 세계는 가짜(幻)가 아니고 브라흐만인데 모습을 바꿔서 현실 세계에 나타난다는 것이라고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하고 흡사한 점이 있다.
물론 스피노자 철학은 인격적 종교성은 배제하는 철학이지만 철학적 논리(logic)는 흡사하다. 그래서 물질과 영혼이 완전히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 신의 부분들인 것이다. 마치 스피노자에게서 물질속성과 정신속성이 ‘신 즉 자연’의 두 속성이듯이 말이다.
베단타 철학은 결론적으로 우파니샤드의 본래 입장을 재사유함으로써 힌두교의 전통을 이어나갔으며 후대에도 계속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은 매우 커서 불교가 쇠퇴하는 이유들 중 하나도 베단타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인도 본토에서 쇠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베단타 철학이 워낙 강력한 논리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불교가 밀려 동북아로 나간다. 그래서 베단타 철학이 지금까지도 인도의 일반적인 철학이 되고 있다.
유럽과 동북아는 전통이 무너져 근대화가 되는데 왜 인도만 힌두교가 지속적인 힘을 행사했는가가 궁금하다. 탈근대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는 유럽은 기독교와 헬레니즘으로 대변되는 전통을 무너뜨리고 근대성을 세웠다.
동북아 문명은 서구에 의해 타율적으로 근대화가 되어 탈근대까지 얘기까지 나왔는데, 인도와 이슬람문명은 지금도 중세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와 이슬람도 지금은 많이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이슬람의 회사원의 경우도 바쁘니까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못 본다. 그래서 서서히 전통이 흔들리지만 아직도 인도와 이슬람은 어떤 의미에서 중세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문화에서는 근대화의 파급력이 약하다.
이슬람이나 힌두라는 개념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삶의 논리(logic)이다. 인도는 정치 경제 문화 모두가 힌두이즘, 이슬람 문화다. 지금은 옛날 같지 않지만 아직도 놀라운 통합성이 유지되고 있다.
어쨌든 브라만 계층에 대항한 자유사상가들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인도 전통을 바꾸는 데에 실패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성공한 것이고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트라 4계급이 살아 있다. 그런 면에서 문제가 있다.
일괄되게 한 편으로만 해석할 순 없지만, 브라만교는 ‘마하바라타’의 새로운 편찬,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마하바라타를, 중간에 바가바드기타를 삽입시키면서 끝없이 새로운 버전을 만든 것이다.
서울신만으로는 지방이 소외감을 느낄 테니까 지방신도 끼워 넣는다. 그러니까 신들의 대중화다. 크리슈나가 대표적이다. 말하자면 우파니샤드 철학의 재해석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브라만교의 성격도 많이 바뀌는데 결국 브라만교가 힌두교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지존의 위치에서 엘리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던 브라만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 브라만교의 성격이 많이 희석이 되어 힌두교가 된다. 그래서 브라만교가 아니라 힌두교로 남게 된다.
힌두교는 종교적 교리이기도 하지만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과 비슷하다.
힌두교는 현실세계 삶과 영적 삶의 갈등을 시간적으로 배열해 해소시켜 줌으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으로써 불교보다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삶과 영적인 삶을 어떻게 양립할 것이냐가 인도철학의 화두다. 해탈을 지향하는 삶과 현실적인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문제다.
그런데 이것을 시간적으로 배열한다. 공간적, 논리적 대립을 시간적으로 해설해서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모크샤를 배열한다.
아르타는 의식주 같은 인간의 원초적 존립조건이다. 카마는 인간의 즐거움이다.
카마를 카마수트라 같은 게 대중적인 에로라고 해석되어 있는데 카마는 성적인 쾌락만이 아니라 연극, 스포츠, 게임을 즐기는 것 등이 모두 카마다.
다르마는 사회의 법을 만들어 지키고 효도를 하고 등의 한 차원 높은 의무다. 모크샤는 해탈이다.
그래서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모크샤는 뒤로 갈수록 더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지 앞의 것을 배척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해탈을 추구하는 데 카마는 나쁜 것이 아니라 네 개가 다 중요하다.
인생의 시기도 학생기(學生期), 배움의 시기→ 가주기(家主期), 결혼하고 돈 벌고 인생 즐기고 누리는 시기→ 임서기(林棲期), 숲에 들어가서 도 닦는 시기 마지막엔 → 유행기(遊行期)는 엄청난 경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완벽하게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눔으로써 평범한 인간으로써의 인생과 영적인 삶의 추구를 시간적으로 해소시켜준다. 이것이 힌두교가 성공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 /조 수 웅 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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