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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9(월) 18:49
기억은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19년 05월 20일(월) 00:00
/조 수 웅 문학박사
‘생명은 차이를 낳는 힘인 동시에 또한 기억이기도 하다’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과음으로 필름이 끊겼다는 말은 깨어날 때까지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만약 시간에 기억이 없다면 찰나밖에 없는 것이다. 찰나가 아니라 이어지는 운동성이 있어야 시간이 있다.
베르그송이 말한 기억은 인간의 기억만이 아니라, 생명체의 유전자도 넓은 의미의 기억장치이다. 기억을 실어 나르는 장치이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에는 찰나밖에 없고 세상은 완벽하게 분산되는 물질 외에 어떤 것도 없게 된다. 물질이 조직 되고 거기에 생명이 들어가고 생명이 유전되고 진화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 모든 게 기억이다. 넓은 의미의 우주론적인 기억이다. 그런데 기억은 동일성이다.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족주의가 흥기할 때 반드시 등장한 것 중의 하나가 긴 기억이다.
일본도, 한국도, 유럽도 다 그랬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를 제시하려면 우리 민족이라는 동일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동일성이 공간으로 나타나면 ‘우리 땅이다.’ 문화로 나타나면 언어(말)이다. 시간으로는 역사다. 역사적 아이덴티티를 확보해야 우리 민족이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는 흥기할 때엔 반드시 역사적 조작이 일어난다. 현대 철학자들은 메모리를 굉장히 비판한다.
니체나 푸코도 메모리를 비판적으로 보는데, 실제 메모리는 기억에 집착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기억은 새로움보다 옛 것을 끝없이 이어가려는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토모 가치 감독이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는 기억을 다룬 영화이다. 기억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냈다.
첫 번째는 과거의 화려함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집착하는 것이다. 두 번째 현재는 마음속에 내장된 메모리를 환경에 따라 못 바꾸는 사람의 코믹한 이야기다. 세 번째는 미래의 기억이다. 얼핏 들으면 모순된다. 과거의 기억은 있어도 미래의 기억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생한다, 적이 쳐들어온다. 그 기억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일종의 파시즘 체제다.
우리로 치면 6·25 때 북한이 쳐들어온다고 만날 사이렌을 울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기억을,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기억이 없으면, 세계는 찰나밖에 없다. 시간으로 말하면 찰나, 공간으로 말하면 파편밖에 없다. 그러면 아무 존재도, 의미도, 문화도 없게 된다.
그런데 기억에 집착하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기억은 동일성과 차이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을 가진, 나는 나인데, 또 변해 간다.
그러니까 내 기억을 통해서 나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해 간다. 동일성과 차이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일성이 완전히 해체되진 않지만 계속 변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나는 나인데, 십 년 전을 생각하면, 그게 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럴 때도 있었나, 언제 이렇게 변했냐 싶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런 생각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일성과 차이가, 시간과 영원이 함께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보면 생명과 물질의 투쟁은 기억과 물질의 투쟁이다. 모든 것을 파편화하여 끌고 가는 물질과,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고 동시에 과거의 것을 이어가려는 생명의 투쟁이다.
죽음도 엔트로피에 굴복하는 것이다. 개체성이 엔트로피로 사라지는 것이다. 화이트 노이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식에게 아이덴티티를 남겨놓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기억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TV 보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러니까 나는 엔트로피에 따라 사라지지만 내 기억은 아들을 통해 남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이 영원(eternity)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기를 닮은 자식을 낳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남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를 읽는 것이 그렇게 남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연속성의 사유에 입각해 ‘무(le neant)’ 개념을 사이비 개념으로 비판했다. 무 개념은 ‘가능성(la possibilite)’ 개념을 전제하며, 베르그송은 무와 가능성 개념이 결국 인간의 주관(관심, 욕망, 바람, 아쉬움)에서 유래함을 역설한다(‘무의 인간화’). 베르그송은 충만한 존재의 철학자이며, 무를 부재(不在)일 뿐인 것으로 봄으로써 서구 철학의 전통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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